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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동경이었다. 확실한 강함, 다른 이 못지 않은 긍지와 자존심까지. 어릴 적부터 나를 괴롭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건 분명한 현실이었다. 동경으로 시작했던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고 끝끝내 사랑으로 번져갔다. 어려웠다.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바쿠고 카츠키 × 미도리야 이즈쿠 × 토도로키 쇼토

바람과, 바다와.

w. vokon




어느 시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너와 내 사이가 좋았던 적은 없었으니까. 네가 나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짜증난다는 점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은 여전했으나 두근대는 심장은 진짜였다. 수업시간도, 얼굴을 보기 힘든 쉬는시간과 점심시간도. 어째선지 내 눈은 항상 캇쨩의 뒤를 쫓고 있었다. 체육대회 이후로 나를 외면하는 캇쨩을 몰래 지켜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런 나를 누군가 눈치챌까 전전긍긍 했을 뿐. 나는 이런 쪽에서 대담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 땐 앞뒤 재지않고 달려들면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애증으로 가득한 캇쨩에세 구차하게 굴고싶진 않아서 마음을 숨기려 했던 걸 수도 있겠다. 가끔 이 모든 게 부질없다 느낄 때는 조금 힘들었지만.



“미도리야.”

“아, 어, 어! 토, 토도로키 군!”

“점심, 먹으러 가자.”



아, 그랬네. 시간이..! 토도로키 군의 말을 듣고 일어나자 교실 앞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우라라카 양과 이이다 군이 보였다. 머쓱하게 뒷목을 긁적이며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 뒷통수가 따가웠다. 들켰을까, 내가 캇쨩을 계속해서 지켜봤다는 걸. 아, 아니, 그렇다고 해서 좋아한다거나 그런 쪽으로 생각하진 않았을 거다. 그리 티나게 행동했던 것도 아니고. 아닐 거야. 나는 작게 되내이며 친구들과 걸었다. 순간 벌렁거린 저를 들킬까 하는 걱정을 애써 외면하며. 약간 얼어붙어 있는 미도리야에게 우라라카는 분위기를 띄울 요량이었는지 발랄한 목소리를 꺼냈다.



“데쿠 군, 이제 슬슬 여름 방학이야! 데쿠 군은 방학 계획이라던가 정한 거 있어?”

“응? 아니, 아직. 우라라카 양은? 생각해 둔게 있었나봐?”

“당연히 바다지! 휴가는 어쨌든 바다라고 생각하는 걸!”



우라라카는 손뼉을 짝, 치며 신난듯 말을 이었다. 우리 다같이 바다라도 갈까? 방학 하자마자! 츠유 쨩이나, 반 아이들 모두 다같이! 그 말에 미도리야는 놀란 표정을 했지만 옆의 이이다는 꽤 동의하는 얼굴이었다. 뒷편의 토도로키 역시. 엑? 지, 진짜? 미도리야가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즈음 먼저 식당에 도착해 있던 아스이와 하카쿠레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카쿠레 쪽이었다.



“와아?! 오챠코 쨩, 바다 가는거야? 데쿠 군이랑!?”

“어? 나는 아직 아무런 말도..”

“괜찮을 것 같은데. 반 아이들 다같이 간다는 점이라면 더.”



하카쿠레의 말에 미도리야가 당황한 어투로 대꾸했지만 아스이는 개의치 않고 말을 끝마쳤다. 그럼 다른 애들한테도 알려줘야하려나. 아스이의 중얼거림에 하카쿠레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아, 자, 잠깐..! 허나 미도리야는 이내 포기했다. 도저히 저멀리 있는 아시도나 야오요로즈, 지로에게로 달려가 바다에 대해 설명하는 하카쿠레를 말릴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미도리야를 곁에 두고 바다를 얘기하는 아스이와 우라라카의 대화가 식당으로 들어오던 남자 아이들에게도 뻗쳤는지 카미나리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말을 꺼냈다.



“뭐야, 너희들 바다 간다고?”

“오! 진짜? 그러고보니 좀 있으면 방학이잖아? 다같이 가면 좋겠다!”

“나도 갈래, 나도!



카미나리를 스타트로 키리시마가, 세로가 뒤를 이었다. 아스이와 우라라카는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미도리야는 도움의 눈빛을 이이다나 토도로키에게 보냈지만 그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여행 계획을 세우던 카미나리는 손뼉을 치며 제 뒤에 있던 바쿠고에게로 넌지시 말을 던졌다.



“야, 바쿠고! 같이 갈래?”

“하아? 내가 왜 너희랑 가?”



저거 또 저러는데 어차피 올꺼야. 키리시마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 인마!? 소리치는 바쿠고에 키리시마는 자연스레 귀를 막았다. 갑자기 커진 판에 미도리야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걸 깨닫고 수긍하기로 했다. 다같이 가면 즐겁긴 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내심 바쿠고가 함께 오길 기대했다.




*




말은 그리 해놓고 진짜로 따라왔다. 키리시마와 카미나리는 그런 바쿠고를 보며 비웃었고 바쿠고는 불같이 화를 냈다. 보기보다 부끄러움을 타나봐. 아스이의 중얼거림에 바쿠고의 이마에는 사거리 마크가 두어 개 더 생겼다. 방학이 시작된 그 주의 주말. 근처 역으로 모인 웅영고 히어로과 1-a반은 수학여행을 가는 것 마냥 들떠있었다. 일정은 1박 2일. 반장인 이이다를 선두로 반 아이들은 신칸센에 올라탔다. 제 자리를 맞춰 앉은 미도리야는 바로 저 옆에 토도로키가 자리하는 것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토, 토도로키 군!?



“..응. 내 자리, 여긴데. 11번.”

“아, 아..! 그, 그랬구나!! 나도 10번이었지. 아, 미안. 놀라서..”

“아냐.”



그 날 이후로 괜히 피하게 된다. 과민반응이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째 옆의 시선이 따갑다. 그럴 만도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미도리야는 토도로키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고맙고 친한 친구다. 계속 무시할 수만은 없을텐데. 사실을 말해야할지 고민하며 미도리야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물론 잠들어 있던 내내 토도로키가 제게 어깨를 내어주었단 사실은 끝까지 몰랐지만.




*




“바다다!!”

“와아!! 엄청 시원해 보여!”



오랜만에 보내는 휴가에 들뜬 마음으로 아이들은 바다로 달려나갔다. 여름이면 비키니지, 하던 남자아이들의 눈이 돌아가기도 몇 번.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던 대부분은 아스이와 모모의 제제에 입을 다물었다. 반팔 후드집업과 반바지 수영복 차림의 미도리야는 제제당하는 아이들을 보며 멋쩍게 웃다 몇 초 안 되어 우라라카와 이이다에 의해 바다로 던져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도리야는 젖은 후드집업을 털털 털어냈다. 신나게 바다에 뛰어드는 반 아이들 중 바쿠고나 토도로키도 언뜻 보이는 듯 했다. 하하.. 캇쨩도 바다를 좋아했던가. 역시 바다는 시원하니까 온 거겠지. 아, 거기다 오늘은 한 마디도 안했네. 뭐 원래 자주 하진 않았지만.. 작게 중얼거리며 후드집업을 껴입던 미도리야는 제 생각에 빠져 곁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제 팔과 어깨를 훅 잡아채는 손에 그제서야 정신 차렸을 뿐이었다. 헉..! 화려한 색깔의 매니큐어가 덧발라진 손이었다. 누, 누구.. 미도리야가 겁에 질린 채로 뒤를 돌아보자 딱 봐도 어른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보였다. 대략 3, 4명 남짓 되는 것 같았다.



“혹시 너 웅영고 학생 아니니?”

“와아, 맞아, 맞아. 그때 그 체육대회!”

“네? 아, 아니..”

“맞지? 뭐더라 이름.. 데쿠?”



어느새 친구들과는 떨어져 홀로 남게되어 어딘가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여자에 대한 면역력이라곤 없는-특히 연상이라면 더더욱- 미도리야에겐 괴로운 시간이었다. 제게 엉겨붙으며 실제로 보니 되게 어리다느니, 피부가 어떻느니 말해대는 그녀들 탓에 미도리야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니아니! 저는 친구들이 저기에..! 손사레 쳐대는 미도리야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나들이랑 놀래? 맛있는 거 사줄게. 야키소바 좋아해? 초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짓궃게 물어오다 당황한 미도리야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했다. 어, 어떡하지.. 속으로 온갖 비명을 질러대던 미도리야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온 건 한순간이었다.



“미도리야.”

“너드 새끼 뭐하냐?”

“어어?”



토도로키와 바쿠고였다. 미도리야는 금세 안도해버린 자신을 발견하곤 헉, 했다. 아, 카, 캇쨩! 토도로키 군! 제 목소리에 엄청난 서러움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저를 놀려대던 여성들도 고갤 들어 토도로키와 바쿠고를 마주했다. 죄송한데, 일행이 있어서요. 토도로키가 먼저 말을 꺼내 미도리야를 제 쪽으로 끌었다. 어? 너희들도 체육대회 1, 2등 아니었어? 어머나..! 둘을 알아본 그녀들은 더 호들갑 떨어대며 셋을 붙잡아두려 했지만 바쿠고에 의해 금방 무마되고 말았다.



“안 꺼지냐? 징그럽게 왜 달라붙어? 늙은 할망구 같은 것들이.”

“뭐, 뭐?!”

“어린 게 누나들이 말하는데 무슨 말버릇이야?”

“하아? 죽고 싶냐?”



바쿠고는 제 손에 번쩍이는 불꽃을 내보이며 짜증을 냈다. 저, 정말 빌런 같네.. 미도리야는 새삼 그리 느꼈지만 바쿠고보다 더한 짜증과 욕을 보이며 멀어져가는 그녀들에 안도했다. 뭐 바쿠고의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미도리야의 어깨를 토도로키가 톡톡 두드리며 끌었다. 가자. 그 덕에 미도리야는 무사히 그녀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쯧. 내가 왜 이딴 놈을 도와줘야해.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바쿠고는 멋대로 성질을 내며 가버렸고 덩그러니 토도로키와 남게 된 미도리야가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사과와 감사를 말했다. 괜찮아, 곤란해 보였으니까. 토도로키의 다정한 말에 미도리야는 웃었다. 역시 좋은 친구였다. 제가 바쿠고에게 향한 마음을 드러내도 그건 변함 없을 거다.



“하하. 토도로키 군은 항상 내가 곤란할 떄 와주네.”

“…”



그 말에 대한 답이 없던 건 다른 이유가 있었서일까. 더 이상 토도로키는 답하지 않았고, 미도리야는 다시 어색해진 분위기에 억눌려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평범치 않았던 탓이었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둘의 대화는 끝이 났다. 미도리야는 저 깊은 마음속부터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함을 느꼈다.




*




반 아이들이 있는 무리로 돌아온 둘은 흩어져 하루동안 제각기 바다를 즐겼다. 그러나 미도리야는 물놀이를 하면서도 어느 한 곳이 찜찜한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던지라 저녁을 거르기로 했다. 저를 걱정하는 얼굴들이 보였지만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며 친구들을 내보냈다. 대신 저는 식당으로 향하는 대신 바다로 걸음을 옮겼다. 노을이 지는 바다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파도가 자르르 부서지는 해변가에 조심스레 앉은 미도리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아까부터 계속 찝찝한 기분이다. 낮의 일도 그렇고, 이래저래 마주하기 꺼려지는 얼굴들이다. 미도리야는 제 머리를 헝클었다. 이래선 친구까지 잃어버릴 지경이다. 정말 가지가지하는구나, 나.. 미도리야가 끝없이 자신을 자책하던 도중이었다.



“미도리야?”



어?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제쪽으로 다가오는 토도로키가 보였다. 수영복을 갈아입었는지 편한 반팔티와 긴 바지 차림에. 어, 저녁은? 안 먹어? 미도리야의 물음에 토도로키가 고개를 내저었다. 제 옆에 앉지않고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는 건 분명 자신을 배려한 것이리라. 미도리야는 섬세한 토도로키의 배려에 작게 웃으며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를 해결해야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정확한 답은 모르지만, 그래도.



“어.. 있잖아. 낮의 일은 고마웠어.”

“…”

“토도로키 군, 혹시.. 저번부터 말야.”

“…”

“눈치챘어?”



제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다. 주어와 목적어는 다 빼놓고 말해버리다니. 얼마나 답이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이게 무슨 짓이야.. 설명해야지. 다짐한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에게로 눈을 돌리려 하던 차였다.



“미도리야.”

“헉.”

“이쪽 봐.”



눈앞까지 다가온 토도로키는 무릎을 모으고 앉은 미도리야의 어깨를 잡아 제쪽으로 돌렸다. 내 얼굴보고 얘기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미도리야는 잠시 놀란 눈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래봤자 이미 내 마음도 눈치챘을 게 뻔한데. 속으로 생각한 말은 아직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은 확고했다. 제 맘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그것이 얼마나 물거품 같은 결말일지도 잘 알고 있었다. 토도로키의 짙게 짓눌린 입술이 보였다. 미도리야는 그 짓눌린 입술만큼이나 속이 탔다. 토도로키는 저를 좋아했다. 제가 바쿠고를 좋아했던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는 것처럼, 토도로키도 그랬을 거다. 저도 눈치챈지 오래였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일 테다. 말해야만 했다, 이제는



“나, 캇쨩.. 좋아하니까.”

“그런 건 알고 있었어.”

“..있지, 나..”

“…”

“그냥 다 괜찮다고, 잘 될거라고 말해주면 안 될까.”



자신이 얼마나 미안한 짓을 하는지 알면서도.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옷깃을 붙잡았다. 되도 않는 결론을 내려놓고 이런 부탁이라니.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질리겠지. 역겨울 정도일지도 모른다. 착잡해지는 머릿 속에 입안이 말라갔다. 이만큼 이기적인 사람이었던가, 나는. 고민은 고민대로 다 하면서 옷깃을 잡은 손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난 미련이 가득한 사람이었구나. 사과해야했다. 해야했는데.



“...난 널 좋아해, 미도리야.”

“..흑, 흐으..”

“그건 그거고.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하니까.”

“흐, 흐끅, 미, 안해, 미안해.”

“울지마. 난 괜찮아.”



저를 안아 머리와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이 너무나 다정했다. 어떻게 너는 이리 다정하고 상냥할 수 있을까. 끝으로 기억나는 건 펑펑 울었던 나와 해가 질 때 까지 내 등을 쓸어주던 토도로키였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인어공주는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홀로 두고 왕자 하나만을 사랑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고. 저도 그녀와 같은 비극적인 결말일 거란 생각을 떨칠 수 없어 미도리야는 자조했다. 인어를 사랑했던 그녀의 언니들은 자신들의 머리칼을 잘라 칼을 만들어 줄 정도였고, 자신은 토도로키를 그렇게 희생시켜 버린 걸지도 몰랐다. 물거품이 될 거란 걸 알면서도 왜 너를 사랑하지 못할까. 그날 밤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

이것 역시 하루만에 썼기 때문에..급전개 쩔고..(탕탕

다른 존잘님들 글은 여기로! > ghkdtnals729.wixsite.com/hiroaka-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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